월영교에서

 

김필녀



가슴에 하나 가득 품고 살아도

그리움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것이 사랑이다

 

마음속에 늘 담고 산다고 해도

한번쯤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는 깊이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는 크기를

알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사랑한다면 

물빛 젖은 입술로

수줍은 고백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호수는 늘 하늘을 품고 살아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그리움

견딜 수 없어 

물안개에 혼을 실어 하늘로 오른다


080814 / 초고

  

 

♬ 사랑을 위하여 / 김종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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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김필녀



해가 지려면 아직

서너 뼘은 남았는데

산그늘에 쉬고 있던 해바라기

낮달과 사랑에 빠졌다

불륜이라고 말할 수 있나

해바라기는 늘

해를 바라보는 듯 했지만

눈부신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

예전부터 몰래

사랑을 키웠던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뜨거울 수 없다

사랑 아닌 불륜이 없듯이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080810

  

첨부파일 사랑하게되면 / 안치환.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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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물들이기

 

김필녀

 

 

그대 잊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잊은 적이 없습니다

무수한 세월 속에서도

마음 안에 늘 내 사람이었던 당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강둑에 홀로 앉아 쳐다보던 별빛보다 

영롱하게 떠오르던 잊지 못할 한 사람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봉숭아 꽃잎보다 수줍었던 우리들 맹세

지금 그대는 잊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의 소용돌이 속에

아름답던 추억 희미해질까 두려워

가슴 설레던 첫사랑 의식처럼

열손가락 손톱마다 정성들여

봉숭아꽃물 곱게 물들였습니다

 

080808 / 초고

 

봉숭아꽃물들인지 20일째 되는 내 손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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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숭아 / 정태춘, 박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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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 김필녀

 

 

아쉬움으로 소멸 되는 오늘
네가 있어 지친 가슴 설레게 한다
긴 기다림 끝 어디쯤서 
너와 나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붉게 타는 노을빛
으로 물들이고 싶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서성이며

그리워 할
아직 떨고 서 있는 기다림의 빛
한 순간 스러진다 해도

그 속에 흠뻑 물들고 싶다

 

080710

 

 


      
    

 길안 대곡리 김연대 시인의 꿈의 회향(글/김필녀-시인)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진 대곡리 찾아가는 길
세 번의 가출 끝에 40년 만에 귀향해서 길안에서도 오지로 알려진 대곡리에 그림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는 김연대(67) 시인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약속시간 3시간 전에 안동시내에서 출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우선 길안장터의 유명한 골부리국집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을 요량이었으나 우리들의 계획과 달리 식당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겨우 한쪽 자리를 차지해서 맛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쫓기듯 식당을 나서야 했다.
식사 후의 텁텁함을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없애기 위해 한티재 휴게실에서 잠시 쉬어갔다. 대곡리가 아무리 오지라 해도 멀어봐야 청송보다야 멀겠느냐며 더 쉬어가자고 했지만, 초행길이라 혹시 길을 잘못 들어 약속시간에 늦을 수 있으니 빨리 출발하자는 편집기자의 재촉을 받고 2시간 전에 출발했다.


청송 가는 길로 접어들어 20여분을 자동차로 달려 용계은행나무 가는 안내판을 막 지나자 오른쪽에 대곡리 4킬로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맞은편으로 가라는 화살표를 따라 좌회전을 하자 바로 산길이 시작되었다.
5월 하순에 접어든 산길에는 하얀 찔레꽃이 정겹게 피어 고향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해 주었다. 산길은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았지만 도로포장은 깨끗하게 잘 되어 있었다. 산으로 막히고 물로 막혔다는 대곡리는 정말 산골이었다. 한참을 가는데 장끼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자동차를 자주 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내 구역인데 웬 놈이 우리 구역을 침범하느냐고 시위를 하는 건지 자동차가 가까이 가서야 ‘푸드득’ 날아갔다.
오지로 알고 출발했던 대곡리는 한티재에서 출발하여 몇 굽이의 산길을 돌고 돌아서 30여분이 지나자 서서히 정겨운 모습을 드러냈다. 산길에서 내려다 본 대곡리는 오밀조밀한 산촌 마을이 아니라 새로 지은 기와집이 몇 채 들어섰고, 새로 집을 짓는 집도 눈에 띄었다. 정체되어 있는 마을이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태동을 하는 마을로 다가왔다. 다만 폐교가 되어버린 대곡초등학교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쓸쓸하게 다가왔다.




고향의 옛 학교에 기와집 짓고 사는 시인
타지사람도 아니건만 괜한 길걱정을 했나보다. 김연대 시인의 맞춤한 설명 덕에 약속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하는 실례(?)를 하게 됐다. 반갑게 집 앞까지 마중을 나온 밀짚모자를 쓴 김연대 시인의 모습은 농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김연대 시인은 700평 대지위에 그림 같은 전통 한옥을 지어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마당에는 파란 잔디가 넓게 깔려 있고 기와집은 지붕이 높고 귀퉁이마다 풍경이 달려 있었다. 집을 향해서 왼쪽에 있는 석탑도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보아도 작은 사찰이나 큰 암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03년 가을에 집을 완공해서 대구에서 이사를 했으니 만 5년이 다 되어간다고 하셨다.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에는 ‘눌운세訥雲世’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어눌하고 더딘 걸음을 걷고자 하는 시인의 철학이 잘 담겨진 집이었다. 안내되어 들어간 서재에는 시인의 모든 것들이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잘 정리가 되어 있었다. 시인의 시가 실린 책이 한 쪽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족사진, 직장생활을 하면서 찍은 사진, 문인활동을 하면서 찍은 중요한 사진들을 실크 스크린을 해서 차롬하게 걸어놓았다. 또 한쪽 면 중앙에는 목탁과 염주가 놓여있고, 구형타자기와 전자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나머지 한 쪽 면은 넓은 통유리로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게 해 놓았다. 나도 김연대 시인의 나이쯤 되면 이런 서재 하나쯤은 가질 수 있을까, 은근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세 번의 가출
“고향을 떠날 때 언젠가 꼭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떠났어요.”
열아홉에 가출한 시인은 그 후로도 몇 번 집을 나갔지만, 항상 귀향을 염두에 두었다.
“구체적인 귀향 계획은 10년 전인 1995년 대곡초등학교가 폐교가 되고, 그 이듬해인 1996년에 학교 부지를 매입하려고 했던 때였어요.“
학교 부지 전체를 사야한다는 교육청 방침으로 매입을 미루었다가 2002년 법이 바뀌고 나서 분할 매입을 해 집을 지었다. 현재 집터는 1948년에 세워졌던 길상초등학교 대곡분교 자리다. 당시로서는 대곡리 산골에 학교가 일찍 들어서서 김연대 시인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이 교육의 혜택을 일찍 받게 되었다. 김연대 시인은 대곡분교 1회 입학생이면서 1회 졸업생이기도 하여 학교 사랑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그때 학교가 들어서지 않았다면 자신도 문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마을 입구에 폐교로 남아 있는 학교를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본다고 한다. 대곡초등학교는 1965년도에 현재 김연대 시인의 집 건너편으로 학교를 옮긴 후 30년 만인 1995년에 폐교가 된 후 대곡리 마을 입구에 그대로 서 있다.


고향을 떠날 때는, 농사일이 막막해 도시로 떠나곤 했던 젊은 혈기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농사일 밖에 할 일이 없었고, 산골이라 농사지을 땅도 많지 않아서 피 끓는 청춘을 그냥 고향에서 썩히기 아까웠고 결국은 꿈을 이루기 위해 가출했지요.”
가출을 하긴 했지만 혼자 객지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부모님의 만류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가족은 부모님과 형제가 모두 5남매였는데 위로 형이 있고, 김연대 시인이 둘째 아들이다.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동생이 둘이다. 형은 공부하느라 일찍 고향을 떠나고 없었고, 부모님과 함께 김연대 시인이 집안의 모든 일들을 했었다. 부모님의 높은 교육열로 형은 안동사범학교를 나와서 교직생활을 했고, 다른 형제들도 모두 중등교육을 다 받게 되었다면서, 부모님의 은공은 지금도 두고두고 감사한다고.




사무기기의 개척자로 자수성가
1차 가출 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에서는 농사일밖에 다른 일을 찾지 못하여 다시 꿈을 찾아 2차 가출을 했고, 3차 가출은 1, 2차 가출과는 달리 결혼을 하고 나서 가족과 함께 무작정 대구로 떠났다고 한다. 대구 원대주차장에 내려서 마땅하게 찾아 갈 데가 없어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빨리 어디로든 가자”는 가족의 재촉을 받고도 갈 데가 없어 막막했던 그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 짓는다.


세 번의 가출을 하면서 미군부대, 공장노동자, 학원 강사, 판매회사세일즈맨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75년부터 사무기기 가게를 운영하면서 희망의 빛이 서서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20여 년간 OA정보통신업계에 몸을 담으면서 정신없이 일했고 열정을 쏟았다.
“일을 열심히 했었고, 자부심도 있어요. 제가 사무기기 부문에선 개척자인 택입니다. 주산을 전자계산기로 대치하고, 수동타자기를 전자타자기로 바꾸었으며, 출퇴근 체크기를 만드는 등 획기적인 사무기기들을 많이 만들었지요. 삼성전자가 생긴 지 불과 5년이 지난 시절이었으니 개인적으로는 사무기기 개척자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하지만 삼성전자는 현재 거대한 회사로 남았는데 자신은 귀향해서 이렇게 살고 있다며 웃는다.


그는 쉽사리 ‘성공’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짐작컨대 세인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꼭 들어가야 할 대화인데도 그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싶은지, 조심스러워했다. 어느 정도 회사가 궤도에 오르고 돈도 벌만큼 벌었다는 생각이 들자 욕심을 버리기로 마음먹고 50대에 접어든 1992년, 막내 동생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를 했다. 바로 밑의 동생도 사무기기 계열회사를 차려 독립을 시켰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결단을 내린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성공을 하게 되면 욕심이 생겨 문어발식으로 회사를 늘여나갈 계획을 할텐데 말이다.




쉰이 다 되어 등단을 한 늦깎이 시인
먹고 살기 바빠서 문학 활동과 시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9년 쉰이 다 되어서 등단을 한 걸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대구문협회원, 한국문협회원, 한국시협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구에서 36년 동안 문학 활동을 하다 보니 고향에 돌아와서도 대부분 대구의 문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고향 안동에서 문학 활동을 할 계획은 없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안동은 내 고향인데 이곳에서 문학 활동을 하게 되면 대충해서도 안 되고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이제는 나이도 있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망설여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안동인이라는 것에 늘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고 한다. 시집을 낼 때나 프로필을 작성할 때도, 서울에서 살 때나 대구에 살 때도 고향은 늘 안동이었다고 한다. 안동의 문인 중에서 김원길 시인, 조영일 시인 등 원로 시인들 중에는 아는 분도 몇 분 있다고 한다.


첫 시집 「꿈의 가출」이 1993년에 출간되면서 1996년 두 번째 시집 「꿈의 해후」가 출간되었고, 세 번째 시집 「꿈의 회향」이 2002년에 출간되었다. 공교롭게도 시집 제목에 ‘꿈’이라는 단어가 다 들어가 있다.
“내 시집 제목을 보면 다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꿈과 관련된 연작시냐고.”
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도 그 자신의 삶의 여정과 비슷하게 이어져 온 듯하다. 첫 시집 ‘꿈의 가출’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이 ‘꿈의 해후’였으니, ‘꿈의 회향’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었으나 묶어 놓고 보니 자신의 자전적 소설집과도 같은 꿈 시리즈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삶과 꿈의 필연적 인과라 생각한다.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밝힌다.
“내 시집들 가운데 몇 편의 시 또한 얼마간은 지상에 남는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내 삶과 꿈의 한 포말(泡沫)일 뿐 참 나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부득불 나의 환영(幻影)과도 같은 그것(시)들을 나라고 이름 해 본다.”


어머니는 내 마음의 영원한 스승
김연대 시인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영혼이 맑고 심령이 깨끗하시고 다정다감 하셨다. 어머니가 몸이 약해서 자주 편찮았고 형은 공부하러 집을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던 그가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학자셨던 친정아버님으로부터 한시를 배워 읊으셨고, 시조를 100수 이상 외우실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대단하셨던 분이었다. 김연대 시인은 그런 어머니가 지은 친필 가사를 손수 정리해서 친필 유고집을 펴내며 애틋하게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의 필체는 내방가사도 아니고, 현대문도 아닌 특이한 문체예요. 비록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신문도 읽으시며 현대의 해박한 지식을 많이 지니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시는 그의 첫 시집에 있던 ‘호박꽃’이었다. 열매가 열리지 않는 호박헛꽃을 자식은 결실을 맺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 드셨다는 헛헛한 울림을 안겨주는 이 시를, 어머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한다.


마당가에 심은 호박넝쿨이
하루 한 두 뼘씩 새순을 뻗어
어머니의 허한 하루를 내일로 끌고 간다


때로 기운이 조금 나시면
어머니는 마당으로 내려와
한 대야 물을 호박뿌리에다 갖다 붓고는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온 만큼이나
숨이 차시다
그래도 친구 만나고 오는 얼굴이시다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에도
호박헛꽃만은 당신만의 것
결실 없는 꽃이라고
당신 혼자만 잡수시던 꽃
그 꽃이 가슴에 지고 가슴에 져서
일흔 여덟 어머니 가슴이 저리 허한가


호박헛꽃 꺾어 밥 위에 찌던
그 젊은 여름날의 꿈이
아직도 어머니 가슴에는 남아 있는건가


기진한 어머니의 허한 하루를
호박순이 저 혼자 내일로 끌고 간다. 




삶을 고향에서 조용히 정리하고 싶습니다.
대곡리 고향사람들은 몇 년 전만 해도 나이 들어 농사짓기도 힘에 부치고, 농사를 지어봐야 남는 것도 없고 해서 환경부에 토지를 팔고 고향을 많이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김연대 시인이 집을 짓고 들어오면서 마을 이장댁도 새로 집을 건축하고 있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퇴직한 분들이 한 명 두 명 귀향을 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의 아파트를 팔면 고향에 돌아와서 새로 집을 잘 지을 수도 있고, 무공해 푸성귀도 손수 가꾸어서 먹을 수 있고, 손자 손녀들에게 시골마을 체험도 시키고 얼마나 좋아요.”
귀향 전과 귀향 후 달라진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평상심이 좌우명”이라며 미소 짓는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고향에 돌아와서는 거의 모든 시간들을 텃밭 300평을 가꾸는데 보내고 있는 그는, 시작(詩作) 활동을 좀 게을리해서 최근에는 회원지나 원고 청탁이 들어올 때나 시를 쓰게 된다며, ‘이러면 안 되는데’ 싶은 얼굴로 쑥스러워 한다.


김연대 시인은 독실한 불교 신자다. 어머니께서 불심이 깊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집도 사찰처럼 지어졌고 마당 한 쪽에 탑도 세워져 있다. 탑을 세울 때 스님을 모시고 봉안법회도 열었다. 탑 안에는 금강경, 반야심경, 부모은중경, 육필시 40편이 봉안되어 있다.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마주보이는 건너편에 산이 있다. 고개 들어 바라보는 눈높이 즈음에, 부모님이 묻혀 계신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게 된 것이 다 부모님 덕이라 감사인사도 올린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그가 이렇게 고향에 돌아오게 된 원천인지도 모른다.


그가 가꾸는 300평 마당 텃밭에는 온갖 푸성귀, 과일나무, 꽃들이 심겨져 있었다. 쌀만 빼고 다 자급자족이 되니 모자람이 없다. 특히 더덕밭이 탐이 나 그 앞에 서성이니 시인이 껄껄 웃으며 말한다.
“고추장만 가지고 나와서 더덕을 직접 캐서 찍어먹으면 기가 차요. 언제 더덕밭 옆에서 막걸리 한 잔 합시다!”
자녀는 딸 셋에 막내로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출가를 하고 이제는 부부 둘이서 삶을 조용히 정리하며 욕심 없이 살고 싶다고 한다.


눌운세 시인, 세상을 향한 어눌하고 더딘 걸음
햇병아리 시인이 원로시인을 취재해야 한다고 했을 때 솔직하게 처음에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서 참 잘 왔다는 생각과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또 한 분의 소중한 인연을 만난 것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림 같은 기와집에서 어눌하고 느린 걸음을 천천히 걷는 시인과의 만남은, 마당의 푸른 잔디만큼이나 하늘빛이 시렸고 우리의 마음도 청량해졌다. ‘눌운세’와 넓은 마당의 파란 잔디, 시인 부부의 따뜻한 배웅과 잘 가꾼 텃밭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뻐꾸기 소리가 더욱 정겹게 들렸다. <안동>

통권116호 - 인물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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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꽃 이야기

 

김필녀

 

 

유월의 숲,

속살마저 푸르게 살찌우는 오후
비릿한 밤꽃 향기에 정신이 아득하다
깊숙한 곳 어디 아직도

여인의 후각 살아 있었나 보다

 

고향집 뒷산 입 벌려 웃던 탐스런 알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밤꽃 필 때 비가 와야 밤 풍년 든다시던
아버님 말씀 곱씹으며

밤꽃들의 유혹 뿌리친다

 

080620

 

 


      능소화, 아름다운 이별 김필녀 인연의 가지에서 화려하게 피었다가 이별의 시간 찾아오면 통째로 몸 던져 이승 떠나는 능소화처럼 내 사랑 그렇게 이별하리라 세상의 많은 꽃들 가지와의 인연 끊지 못하고 가지 잡고 시들다 죽어 가지만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미련없이 떠나는 능소화처럼 내 사랑도 그렇게 이별하리라 마흔 일곱의 이 뜨거운 여름 주황빛으로 떨어져 누운 능소화꽃을 보며 내 비로소 깨달았네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선택하는 이별이라는 것을 / 030720 - 2007년 12월 샘문학 창간호 '물의 노래' 출품작
♬ 인 연 / 이선희 ♬
      ..
      
      
      
      그렇게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다 
      김필녀 
      노을 물드는 강가에서 
      갈대 귀 간질이는 바람이 아니라 
      아직 새들 눈뜨지 않은 푸른 새벽 
      버선발로 기다리는 안개의 얼굴로 
      한 순간 온몸을 흠뻑 적시는 
      바다 떠나 온 여름날 소나기가 아니라 
      날마다 아침 오면 마냥 스러져도 좋을 
      이슬 하나의 맑은 가슴으로 
      강 건너 불빛처럼 가난한 마음 
      마지막 순간 운명처럼 사라지더라도 
      해야 할 말 아낄 줄 아는 지혜로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다 
      밤마다 꿈속에서 혼자 건너는 강이라도 
      아침 오면 밝은 햇살에 
      젖은 가슴 말리는 그런 사랑 
      그 사랑으로 부를 수 있는 너라면 
      사랑으로 하여 그 어떤 절망 마주한대도 
      한 방울 뜨거운 눈물도 
      가슴속에서 말리며 내보이지 않고 
      그렇게 나는 너를 사랑하고 싶다 
      03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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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두 따는 남자


      김필녀

       

       

      엉거주춤한 손놀림으로 난생처음

      빨갛게 익은 앵두를 조심스레 따던 그 남자

      가슴 설레는 첫 경험 주체할 길 없었는지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입안에 침이 고인다

      마을 뒷산 늘어진 소나무 가지 위에

      굵은 동아줄 그네가 매어지면

      고향집 마당 앞에 서 있던 앵두도 익어갔다

      아침저녁으로 앵두나무 밑을 서성이며

      산골 계집애의 조그만 얼굴도 덩달아 행복했던

      기억 저편의 그리움 밀물처럼 밀려온다

      그 남자 지금쯤

      앵두 같은 고운 입술의 첫사랑 생각하며

      열아홉 추억 속을 헤매고 있을까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고

      빨간 앵두와 씨름하고 있을까

      초나흘 흐릿한 달빛 아래 시인은

      가물거리는 기억 헤집으며

      한 줄 시를 찾아 헤매고 있다

       

      08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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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필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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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명 : 김필녀(金畢女)

      ♣ 아호 : 雅靜

      ♣ 경북 봉화 출생

      ♣ 월간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상 등단

      ♣ 안동주부문학회원, 샘문학동인, 안동문협회원

      ♣ 안동방송국 네티즌리포터 및 칼럼작가

      ♣ 격월간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 신안동인 집필

      ♣ 현재 논술학원 교사

      ♣ 시댁인 영주 단산 등지에서 풍기인삼 재배

       

        ♣ 메 일 : adelite@hanmail.net

      ♣ 카 페 : http://cafe.daum.net/kimajung 

      ♣ 연락처 : 011-824-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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