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다 되어 등단을 한 늦깎이 시인 먹고 살기 바빠서 문학 활동과 시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9년 쉰이 다 되어서 등단을 한 걸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대구문협회원, 한국문협회원, 한국시협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구에서 36년 동안 문학 활동을 하다 보니 고향에 돌아와서도 대부분 대구의 문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 고향 안동에서 문학 활동을 할 계획은 없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안동은 내 고향인데 이곳에서 문학 활동을 하게 되면 대충해서도 안 되고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이제는 나이도 있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망설여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안동인이라는 것에 늘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고 한다. 시집을 낼 때나 프로필을 작성할 때도, 서울에서 살 때나 대구에 살 때도 고향은 늘 안동이었다고 한다. 안동의 문인 중에서 김원길 시인, 조영일 시인 등 원로 시인들 중에는 아는 분도 몇 분 있다고 한다.
첫 시집 「꿈의 가출」이 1993년에 출간되면서 1996년 두 번째 시집 「꿈의 해후」가 출간되었고, 세 번째 시집 「꿈의 회향」이 2002년에 출간되었다. 공교롭게도 시집 제목에 ‘꿈’이라는 단어가 다 들어가 있다. “내 시집 제목을 보면 다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꿈과 관련된 연작시냐고.” 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도 그 자신의 삶의 여정과 비슷하게 이어져 온 듯하다. 첫 시집 ‘꿈의 가출’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이 ‘꿈의 해후’였으니, ‘꿈의 회향’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의도된 것은 아니었으나 묶어 놓고 보니 자신의 자전적 소설집과도 같은 꿈 시리즈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삶과 꿈의 필연적 인과라 생각한다.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밝힌다. “내 시집들 가운데 몇 편의 시 또한 얼마간은 지상에 남는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내 삶과 꿈의 한 포말(泡沫)일 뿐 참 나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부득불 나의 환영(幻影)과도 같은 그것(시)들을 나라고 이름 해 본다.”
어머니는 내 마음의 영원한 스승 김연대 시인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영혼이 맑고 심령이 깨끗하시고 다정다감 하셨다. 어머니가 몸이 약해서 자주 편찮았고 형은 공부하러 집을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던 그가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학자셨던 친정아버님으로부터 한시를 배워 읊으셨고, 시조를 100수 이상 외우실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대단하셨던 분이었다. 김연대 시인은 그런 어머니가 지은 친필 가사를 손수 정리해서 친필 유고집을 펴내며 애틋하게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의 필체는 내방가사도 아니고, 현대문도 아닌 특이한 문체예요. 비록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신문도 읽으시며 현대의 해박한 지식을 많이 지니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런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시는 그의 첫 시집에 있던 ‘호박꽃’이었다. 열매가 열리지 않는 호박헛꽃을 자식은 결실을 맺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 드셨다는 헛헛한 울림을 안겨주는 이 시를, 어머니는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한다.
마당가에 심은 호박넝쿨이 하루 한 두 뼘씩 새순을 뻗어 어머니의 허한 하루를 내일로 끌고 간다
때로 기운이 조금 나시면 어머니는 마당으로 내려와 한 대야 물을 호박뿌리에다 갖다 붓고는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온 만큼이나 숨이 차시다 그래도 친구 만나고 오는 얼굴이시다
모두가 배고프던 시절에도 호박헛꽃만은 당신만의 것 결실 없는 꽃이라고 당신 혼자만 잡수시던 꽃 그 꽃이 가슴에 지고 가슴에 져서 일흔 여덟 어머니 가슴이 저리 허한가
호박헛꽃 꺾어 밥 위에 찌던 그 젊은 여름날의 꿈이 아직도 어머니 가슴에는 남아 있는건가
기진한 어머니의 허한 하루를 호박순이 저 혼자 내일로 끌고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