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하회마을을 다녀왔어요 / 070623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하회마을 다녀왔어요!
흥겨운 하회탈춤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회탈춤 공연장도 새로 단장을 했고, 매표소 지나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 쪽에 백련이 참 예쁘게 피었더군요...^^
주말이라 그런지 하회마을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하회탈춤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사진 맨 밑에 올려놓았습니다.
(강신을 부르고 무등마당이 끝난 다음 주지놀이가 시작되고...)

(부네탈)

(초랭이)

(백정마당이 시작되고...)




(할미 마당)



(이매와 초랭이)

(선비와 양반)

(양반, 부네, 선비)

    하회(河回) 별신(別神)굿 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서낭신에게 해마다 정월 보름과 4월 8일에 올리는 평상제(平常祭)는 동제(洞祭) 또는 제사(祭祀)라고 부르고, 별신(別神)굿은 약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정월 보름날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서낭신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서낭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탈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대내림을 하는데, 섣달 그믐날이나 정월 초이튿날 아침 산주(山主)와 광대들이 서낭당에 올라가서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로 강신(降神)을 빌어서 대가 내리면, 당방울을 서낭대 꼭대기에 옮겨 달고, 서낭대를 앞세워 하산한다. 일행이 동사에 다다르면 서낭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면 농악을 울리며 한바탕 놀이를 벌인다. 탈놀이를 시작하려면 각자의 탈을 쓰고 탈놀이 준비를 하며, 자기 차례가 되지 않은 광대들은 농악을 울린다. 놀이마당은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과 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이며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17세 처녀인 서낭신을 위로하기 위해 치르는 것이라고 하지만, 풍요의례(豊饒儀禮)의 뜻도 있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마지막으로 무당들에 의해 헛천거리굿을 하여 별신굿을 하는 동안 마을에 들어온 잡신(雜神)들을 보내는 것으로 끝낸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이같이 서낭님을 위하는 별신굿 의례의 일부로서,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이나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놀이마당 8마당 ■ 첫째 마당 각시의 무동마당 이다. 각시탈을 쓴 광대는 무동을 타고 꽹과리를 들고 구경꾼 앞을 돌면서 걸립(乞粒)을 한다. 이렇게 모은 전곡은 모두 별신굿행사에 쓰고, 남으면 다음 행사를 위해 모아둔다. (제1회 전국민속예술제에서「안동놋다리밟기」와 함께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던 놀이마당에는「무동마당」이 없었으나, 그 후 추가되었음.) ■ 둘째 마당 주지놀이인데 주지는 곧 사자를 뜻하며, 주지놀이는 개장의 액풀이마당이다. 누런 상포 같은 것을 머리로부터 뒤집어쓰고 두 손으로 꿩털이 꽂힌 주지탈을 쓴 한쌍의 암수 주지가 나와 춤을 춘다. ■ 셋째 마당 백정이 도끼와 칼을 넣은 망태를 메고 나와 소를 잡고, 우랑을 끊어들고 구경꾼들에게 사라고 한다. 구경꾼들은 돈을 건네주고 우랑을 받는 척한다. 이것도 걸립의 일종이다. ■ 넷째 마당 쪽박을 허리에 차고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허리를 드러낸 할미광대가 나와 살림살이로 베를 짜며 한평생 고달프게 살아온 신세타령을 베틀가에 얹어서 부른다. 이어서 천천히 일어나 춤을 추다가 구경꾼들에게서 쪽박으로 걸립한다. ■ 다섯째 마당 - 파계승(破戒僧)마당은 부네가 나와 오금춤을 추다가 오줌을 눈다. 이때 중이 등장하여 이 광경을 엿보다가 나와 오줌을 눈 자리의 흙을 긁어모아 냄새를 맡고 흥분하여 날렵하게 부네를 옆구리에 차고 도망간다. ■ 여섯째 마당 양반이 하인 초랭이를 데리고, 선비는 부네가 뒤따르며 등장한다. 양반과 선비는 서로 문자를 써가며 지체와 학식 자랑을 하다가 결국 양반이 선비에게 욕을 먹고 지게 된다. 그러다가 서로 화해를 하고 부네와 초랭이까지 한데 어울려 춤을 추며 논다. 이때 별채 역인 이매가 나와 환재 바치시오라고 외치면 모두 놀라서 허겁지겁 도망을 간다. 여기서 무동마당부터의 여섯 마당의 탈놀이는 끝나고, 별신굿의례인 당제(堂祭)를 15일 아침부터 서낭당에 올라가서 지내고 내려오면서 동리 입구에서 혼례마당과 신방마당을 치른다.
♬ 흥겨운 우리가락 모음 ♬

바다가 보고 싶어 강구 삼사해상공원을 다녀왔어요 / 070619

(가는 길에 청송 야송미술관에 들려서 야송선생님도 만났어요)

(25일부터 한국수석화전과 도화전이 열린다고 하는데 미리 구경했어요.)

(야송미술관 앞에 미리 핀 코스모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며 삼사해상공원에서 한 컷...^^)

(삼사해상공원에서 내려다 본 동해바다)




(전국적으로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바닷가는 시원했어요...^^)

(옆지기의 일 때문에 동승해서 바다구경을 하게 되었지요)

(옆지기도 모처럼 바닷가에서 망중한을 보내고 있네요...^^)

(파도는 쉬지 않고 밀려오고...)

(바닷가에서 다시 한 컷...^^)

(시상 하나 건지려고 바닷가를 찾았는데...)

(비릿한 바다냄새와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뒤로 하고...)
♬ Monaco (모나코) / Jean-Francois Mauice ♬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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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죽선의 풍류와 멋


    "여름 생색은 부채요, 겨울 생색은 달력이라"는 말이 있었다.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는 부채를 선물하고, 다가올 새해를 위해서는 동지에 달력을 선물하는 풍속을 이르는 말이다. 부채 중에 합죽선(合竹扇)이라는 것이 있다.

    대나무의 겉대를 얇게 깎아 양면이 모두 겉대가 되게 서로 합하여 부레풀로 붙였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 부채는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중국이나 일본에까지 그 기술이 전해져 고려선(高麗扇)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하니 우리나라 고유의 부채인 셈이다.

    흔히 코카콜라병은 서양 여성의 외양을 표현한다고들 한다.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주름치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합죽선은 훨씬 오래 전부터 우리네 여인들의 고유한 자태와 우아한 여성적 선(線)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전주의 부채 명장 이기동 옹(翁)에 따르면 합죽선은 고려시대 때 속세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외롭게 수행 하던 한 스님이 노리개 감으로 만든 데서 비롯되었으며, 외양은 여체(女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제일 위쪽의 동물 뼈로 만든 곳은 가채를 쓴 머리부분에 해당하고, 양쪽으로 연결된 고리는 비녀를 나타내며, 손잡이 부분은 한복의 윗저고리이며, 길쭉하게 뻗어 내린 부분은 치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 눈여겨 볼 것은 살과 마디에 인두로 새겨 넣은 문양이다. 합죽선의 살에는 박쥐를, 마디에는 국화를 새겨 넣는 것이 예로부터 전통이었다고 한다. 이 문양은 외형이 갖는 의미 즉 여체와 연관되게 낙죽(烙竹)을 놓아 흥미롭다. 박쥐문양은 남녀의 성적교합과 복을 염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박쥐가 야행성(夜行性) 동물이듯이 남녀간의 행위는 밤에 이루어지고, 박쥐를 한자로 복(蝠)이라고 하니 인간의 복(福)과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마디부분에 새긴 국화는 절개를 나타내는데 서리 올 때 피어 눈(雪)을 맞으며 지는 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낙죽(烙竹)한 국화의 의미는 합죽선을 소지한 남성 자신의 내부를 향한 강한 절개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선조들은 남녀간의 교합과 복을 염원하면서도 자기 수양의 방편으로 합죽선을 소지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규중의 여인들이 합죽선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동성연애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금기시되었다.

    『동국세시기』에 단오절이 다가오면 공조(工曹)에서는 단오선(端午扇)을 만들어 궁에 바치는데 왕은 그것을 각 궁에 속한 하인들과 재상, 시종신(侍從臣) 등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합죽선이 진상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합죽선은 소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상류계층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귀한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합죽선은 바람을 일으키는 일차적인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허리춤에 꿰어 차고 다니다가 찬바람이나 먼지를 막기도 하고, 만나서 거북한 상대라도 부딪치게 되면 외면하지 않고 자연스레 부채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또 시조나 가곡이라도 한 곡 할라치면 부채로 장단을 맞추거나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풍류와 멋을 즐기기도 했다.

    외진 고갯마루에서 갑자지 불량배나 강도를 만났을 때에는 호신용으로도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선비들에게는 사철 애용물이었던 셈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노래개나 은장도를 소지하듯 선비들은 합죽선을 소지했던 것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슳어 하노라.” 선조 때 임재가 평안도 감찰사로 부임하던 길에 송도에서 명기 황 진이를 찾았으나 이미 죽었다 하므로 그를 추모하여, 지니고 있던 부채에 안타까운 마음을 적어 넣었다.

    그러나 훗날 이 시가 유림의 문제가 되어 벼슬을 내놓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자 “한겨울에 부채 선물을 이상히 생각하지 말라. 너는 아직 나이 어리니 어찌 능히 알겠냐만 한밤중 서로의 생각에 불이 나게 되면 무더운 여름 유월의 염천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고 적어 어린 기생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합죽선에 담은 선조들의 풍류와 멋을 알 것도 같다.




출처 : yesulchon
글쓴이 : 淸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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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전국내방가사 경창대회 사진 / 070618
제11회 전국내방가사 경창대회가 
안동시민회관에서 있었습니다.
예선을 거쳐서 본선에 진출한 20명이 참석했는데 
올해는 가사를 직접 쓴 분들이 경창까지 하게 되어 
더 뜻 깊은 대회였습니다.
옛 여인네들은 내방가사를 통해서 
가슴에 쌓인 희로애락을 가사를 짓고
그 가사를 경창하면서 한을 풀어내는
멋을 아는 분들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방가사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에 쫓기며 살다보니 
번번이 기회를 놓치곤 했는데, 
오늘 경창대회를 직접 관람하게 되어
참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특히 안동주부문학 김명자회장님께서
우수상을 받게 되어 더 뜻 깊은 날이기도 했답니다.

회장님 축하드려요...^^




(이선자 내방가사 보존회장)

(류희걸 심사위원장님)

(내방가사 경창대회 참가하신분들)

(우수상을 받은 김명자 안동주부문학회장님)



(즉석 뒷풀이)


(시상식 후 단체사진)

(경청하고 있는 안동주부문학 회원님들)

(시상식 후 안동주부문학회원들과 함께)

(김명자회장님 동생분들과 함께)

♬ 내가 만일 / 안치환 ♬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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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한마당잔치와 안동문화원 준공식 사진모음
안동 웅부공원에서 있었던
단오맞이 여성한마당잔치와 
안동문화원 개원식에 다녀왔습니다.
안동에서는 매년 단오절 무렵에 
여성한마당잔치가 열리고 있지요.
한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여인네들이
내방가사 경창대회, 전통혼례식, 화전 굽기, 
그네 띠기 등을 시연하며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여인들의 각종
전통놀이를 시연하고 있답니다.
올해는 안동문화원 개원식과 함께
행사를 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로 붐비더군요.
오후에 논술수업이 있어서 행사를 끝까지 
관전하지 못해 아쉬웠습니다만,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사진을 올립니다.
(여성한마당 잔치 사진)







(안동문화원 개원식 사진)











♬ 내가 만일 / 안치환 ♬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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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기억해야 할 몇가지
    누워있지 말고 끊임없이 움직여라. 움직이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 하루에 하나씩 즐거운 일을 만들어라. 하루가 즐거우면 평생이 즐겁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웃으며 받아 들여라. 이 세상 모두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아무리 효자도 간섭하면 싫어한다. 젊은이들과 어울려라. 젊은 기분이 유입되면 활력이 생겨난다. 한번 한 소리는 두 번 이상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따돌림을 받는다. 모여서 남을 흉보지 말라. 나이 값하는 어른만이 존경을 받는다. 지혜롭게 처신하라. 섣불리 행동하면 노망으로 오해 받는다. 성질을 느긋하게 가져라. 조급한 사람이 언제나 먼저 간다. 매일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하라. 그래야만 사람이 피하지 않는다. 돈이 재산이 아니라 사람이 재산이다. 돈 때문에 재산을 잃지 마라. 술 담배를 줄여라. 내 나라 내가 지키듯 내 생명 내가 지킨다. 좋은 책을 읽고 또 읽어라. 마음이 풍요해지고 치매가 예방된다. 대우 받으려고 하지 마라. 어제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먼저 모범을 보여라. 그래야 젊은이들이 본을 받는다. 경로석에 앉지 마라. 서서 움직이면 그곳이 헬스클럽이다. 주는데 인색하지 마라. 되로 주면 말로 돌아온다. 하루에 10분씩 웃어라. 수명이 연장되고 인자한 어른으로 기억된다. 걱정은 단명의 주범이다. 걱정할 가치가 있는 일만 걱정하라. 남의 잘못을 보며 괴로워 말고 잘하는 점만을 보며 기뻐하라. 급할 때만 하나님 조상님 하지 말라. 미리부터 그분들과 거래하라. 병을 두려워 말라. 일병장수(一病長壽) 무병단명(無病短命)이라는 말도 있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지 말라.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밝은 눈으로 바라보라. 아파트 관리비만 신경 쓰지 말라. 자기 관리비도 신경을 써라. 좋건 나쁘건 지난날은 무효다. 소용없는 일에 집착하지 말라. 누가 욕한다고 속상해 하지 말라. 죽은 사람은 욕먹지 않는다. 고마웠던 기억만을 간직하라. 괴로웠던 기억은 깨끗이 지워버려라. 즐거운 마음으로 잠을 자라. 잠 속에서 축복이 열매를 맺는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울려라. 바보와 어울리면 어느새 바보가 된다. 그날에 있었던 좋은 일만 기록하라. 그것이 행복 노트다. 작은 것도 크게 기뻐하라. 기쁠 일이 늘어난다. 멋이란 누가 쥐어서 주는것 아니니 내면의 멋있는 삶을 날마다 기억하라 유서를 작성하고 다녀라. 그것은 자신의 고백서요, 삶의 계산서다. 내가 가지고 떠날 것은 없다.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라.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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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죽령사진 모음
새벽 6시에 안동에서 출발해서 7시에 인삼밭에 도착해
12시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풍기온천으로 해서 죽령을 들려
6월의 싱그러운 바람을 마음껏 쐬고 왔습니다...^^





(죽령 주막...)


(죽령 옛길...^^)





(영주에서 죽령을 넘으면 충청북도...^^)
    위 치 :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일대 개 요 : 소백산맥을 넘는 죽령은 문경새재와 추풍령 등과 함께 영남의 삼관문의 하나이고, 그 중 으뜸으로 손꼽혀 왔다. 소백산 제 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을 정상으로 해발 689m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158년) 3월에 열린 것으로 기록되고 있고, 동국여지 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 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해 불꽃튀는 격전을 펼치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때인 서기 470년경이며, 그 후 신라 진흥왕 12년(5 51년)에 신라에 복속되자, 영양왕 1년(590년)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왕께 자청하 여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등의 기록(삼국사기)과 함 께, 소백산 북쪽 자락에 온달산성이 전해오고 있다. 이후에도 영남 내륙의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를 모두 이 길을 거쳐야 해, 나라의 관리들 은 물론, 온갖 물산이 보부상들의 등에 업혀 이 고갯길을 넘나들었다. 그래서 고갯길 양 쪽의 단양과 청풍, 영주와 풍기 등지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들어섰 고, 이들 장터는 늘 성시를 이루곤 했다는 것이다. 줄잡아 2천여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영남 내륙을 잇는 동맥의 역할을 해온 이 길이 2001 년 터널이 뚫리면서 이제 다시 호젓한 옛 모습을 되찾은 것 같다. 더욱이 그동안 숲 덩굴에 묻혀있던 그 옛날 오솔길을 영주시에서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 하자는 뜻에서 1999년 5월 이 길(2.5km)을 다시 뚫어, 안내판과 함께 단장을 마쳤고, 새 터널까지 열려, 시대를 달리 하는 3가지의 길 모습들이 각각 다른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 길을 장식하게 됐다. 이같은 내력을 되새기며 넘는 맑고 한적한 죽령고개는 두고두고 멋진 고갯길 드라이브코 스로 남았으면 한다. 주변관광지 : 부석사, 소수서원, 소백산풍기온천, 소백산 국립공원, 희방사 및 희방폭포, 죽계구곡, 초암사, 비로사 등
♬ 내가 만일 / 안치환 ♬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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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사 영산암에서 김필녀 천년 고찰 봉정사에 가거든 덕휘루를 통하여 대웅전과 극락전을 둘러보고 요사채 뒤쪽 산자락으로 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보라 머리 숙여 우하루 밑을 지나 영산암 안마당에 올라서면 고건축의 미학을 모르는 문외한도 고요한 한옥의 조화로움에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온다 툇마루와 누마루의 정겨움에 잠시 넋을 빼앗긴 채 돌아서는데 멋스럽게 휘어진 고목 향나무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아는 듯 조용히 반긴다 사는 일 외롭고 힘든 날에는 한 번쯤은 일상을 탈출하여 파도처럼 출렁이는 마음을 다스리며 산사의 고즈넉함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자 내가 만든 시간의 굴레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한 번 찾아보자 070527 / 초고
(영산암 우화루) (영산암 관심당) (영산암 송암당) (영산암 응진전(나한전)) (영산암 삼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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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인연'을 접은 금아 피천득

 


[중앙일보]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겠지만…."

금아 피천득이 살아생전 남긴 말. 자신의 사후를 예견했던 것일까.

◇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을"= 금아 피천득(97)이 25일 오후 11시 40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금아는 지난주부터 폐렴 증세로 병원에 입원, 25일 오후부터 상태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져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피천득은 일상의 평범한 소재를 서정적이고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 한국 수필문학계의 대표 작가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인연 中)

대표작 '인연'은 자신이 열일곱 되던 해 하숙집 딸인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내용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대표작 '인연' 등 16편의 수필작품이 수록된 '피천득 수필집'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출간됐을 때 그는 "살아있다면 지금 84세인데…. 샌프란시스코에는 일본인 이민자가 많으니 아마도 '인연'이 일어로 나왔다는 소식 정도는 듣겠지요"라는 말로 그때를 회상했었다.

◇ 하늘나라의 아이= 소설가 최인호씨는 금아의 죽음을 두고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소년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는 딸 서영씨가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을 목욕시키고 머리를 묶어주고 옷을 갈아 입히는 등 애지중지 여겼다. 또 자신이 '마지막 애인'이라 불렀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의 사진을 가까이 두기도 해 "아직 소년이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자신의 발표작 가운데 어린이가 읽기 적당한 시와 수필 등을 엮어 '어린 벗에게'(2002년)를 내기도 했다.

금아의 딸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다.

"서영이는 내 책상 위에 '아빠 몸조심'이라고 먹글씨로 예쁘게 써 붙였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 몸조심'이 '아빠 마음조심'으로 바뀌었다.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중략) 아무려나 서영이는 나의 방파제이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으며, 나의 마음 속에 안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다."('서영이' 중)

그가 사랑한 딸 서영씨와 남편 로먼 재키(MIT 물리학 교수)씨 사이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 역시 금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 5월 29일 태어나 같은 날 떠나= 1910년 5월 29일생인 금아는 2007년 5월 29일에 장례를 치르게 됐다. 자신의 98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태어난 날 세상을 접는' 인연이 됐다. 금아는 일곱 살 때 부친을, 열살 때 모친을 여의었다.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때 춘원 이광수를 만났고 '거문고 소년'이라는 뜻의 아호 '금아'를 그에게 주었다. 이광수는 금아에게 보다 폭넓은 문화를 배워 오라며 중국 유학을 권했다. 유학 후 금아는 이광수와 3년간 함께 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에서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안창호가 순국했을 때 금아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본 제국의 눈이 그를 주시했기 때문. 후에 금아는 이 일로 평생 마음의 고통을 씻지 못했다고 한다.

금아는 37년 중국의 후장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다. 46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69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었다. 75년부터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활동했었다.

유족으로 부인 임진호(89) 여사와 세영(재미 사업가), 수영(울산의대 신생아과 교수), 딸 서영(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9일 오전 7시. 02-3010-2631.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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