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실 / 김필녀 시린 세월 끌고 먼 길 휘돌아 찾아든 *늪실 정겹던 초가지붕 하나 없이 낯선 동구 앞 반기며 우뚝 선 느티나무 아래 정월 열나흘 밤 당집 밝히던 불빛은 교회당 뾰족한 십자가로 빛나고 토담 틔워 넘나들며 살던 이웃 다정하던 모습들 다 아스라한 세월 너머로 숨었다 더께진 시간 걷어내면 어느 골목길에서 어린 날의 그 그리운 얼굴들 까르르 웃음처럼 번져 나올 듯 수숫대 흔들리는 밭이랑 돌아가 들국화 한 아름 꺾어 안으면 그리운 네 모습 찾아질까 *늪실:경북 봉화군 봉성면 외삼리에 있는 필자의 고향 마을 이름
(내 고향 봉화군 봉성면 외삼1리 늪실 푯말) (늪실 마을 유래) (고향 늪실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뒤로 보이는 영양김씨 집성촌인 양짓마을 전경) (코스모스가 아름다운 고향길) (어릴적에 친구들과 올라가 놀던 마을 앞 동메산은 없어지고...) (감나무에도 감이 주황색으로 익어 가고...) (메밀꽃이 하얗게 피어 더욱 정겨운 내 고향 늪실) - 사진 / 봉초사랑방 32회 선배 늪실님 작품임 - 070912 ♬ Ever Green / Suzanne Jack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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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모스 밤마다 꾸는 꿈 가을하늘 아래 하늘하늘 풀어놓았다 갈바람에 흔들리며 꿈을 꾸듯 써 놓고 간 그립다는 연애편지 코스모스 꽃잎 위에 그리운 얼굴 떠오르면 내 사유의 뜨락에도 흔들리며 가을이 온다 070904 / 김필녀

기다리는 마음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나는 너를 기다렸다 흐르다가 보면 언젠가 너를 만날 것 같아서 한 순간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너를 향한 그리움이 넘쳐서 숨이 멎도록 가슴 벅차기도 했다 힘들고 벅찬 세월 속에서도 새벽안개에 마음 다스리며 너를 생각하며 살았다 언젠가 내가 이 강가에서 너를 생각하며 눈물 짓는다고 해도 부질없는 기다림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기다리는 일이 한 평생을 마주하는 일이라 해도 나는 너를 운명처럼 기다릴 것이다 070831 / 김필녀 ♬ when l need you / Leo Sayer♬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가을이 오니까 너도 내 마음 같았으면 좋겠다 우리 바람 선선하게 부는 날 따뜻한 차 한 잔 앞에 놓고서 가을을 이야기하지 않을래 장미처럼 진한 향기 머금고서 들꽃처럼 은은한 마음을 담아서 우리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을래 여름 햇살 너머 가을이 오고 있어 넓은 가을들판에 누워 쪽빛 하늘을 같이 보지 않을래 가을이 오니까 더 보고 싶다 너도 내 마음같이 내가 보고 싶었으면 좋겠다 070828 / 김필녀 ♬ 가을의 속삭임 / Richard Clayderm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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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으로 발행되는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에

'新 안동인' 취재기사를 연재로 쓰게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사랑방 홈페이지 참조하세요  http://www.andongji.com/

 

 풍천 사는 필리핀 새댁 조나린(글/김필녀-안동주부문학회원)

자귀나무 가득한 풍천 가는 길
장마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몹시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사랑하는 님을 따라 머나먼 필리핀에서 안동으로 시집 온 조나린(Jonalyn Lingbawan Jandoc, 31세)씨를 만나기 위해 나선 길. 안동시내에서 풍천으로 가는 길은 고향을 찾아가는 길처럼 정겨운 풍경으로 이어졌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은 진녹색의 물결이 절정을 이루어 더위에 지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도로변에 접한 시골집 담 밑에는 접시꽃, 맨드라미, 백일홍, 다알리아 등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본 꽃들이 다소곳이 피어 있었고, 드문드문 가로수 사이로 심어놓은 무궁화가 흰색과 분홍색 꽃을 막 피우고 있었다. 멀리 언덕에는 집안에 심어 놓으면 부부간 금실이 좋아진다는 자귀나무가 연분홍 꽃을 마음껏 뽐내며 피어 있었다. 풍산 읍내를 벗어나서 풍천 광덕으로 가기 위해 하회마을 가는 길로 접어들자 왼쪽으로 넓은 풍산들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졌다. 모내기를 하던 풍경이 엊그제 같았는데 심어 놓은 모포기는 벌써 많이 자라서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풍성함을 자랑했다. 녹색의 향연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논 한가운데는 하얀 백로들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여름의 산과 들은 수채화를 펼쳐놓은 듯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어졌다.


인심좋은 풍천에 정착한 필리핀 새댁 조나린
조나린 씨 집을 방문하기 전, 얼마 전에 조나린 씨의 친정 양어머니가 된 윤순옥 씨와 농가주부모임 경북회장 김옥희 씨를 서안동농협 풍천지점에서 만났다. 서안동농협 복지과장 맹진숙 씨도 함께 자리를 같이 해 서안동농협에서도 결혼이주여성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듣게 되었다. 풍천면에만 해도 국제결혼이주여성들이 2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이젠 외국새댁이 낯설지 않은 농촌풍경이다. 한국으로 시집온 새댁들이 서로 이웃하고 있어 의지가 많이 된다고 한다. 특히 조나린 씨는 성실하고 성격도 낙천적이라 만나보면 ‘사람 참 괜찮네’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거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혼을 해서 살다보면 어릴 때부터 살아왔던 친정동네도 그립고, 특히 친정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을 때가 많을 텐데 조나린 씨처럼 친정이 멀리 있으면 참 막막할 것이다. 그래서 조나린 씨가 정착해 살아가는 데에 조금이나마 의지가 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서안동농협에서 주선해서 윤순옥 씨와 친정 양어머니를 맺었다고 한다. 살다가 보면 마음이 외롭고 쓸쓸할 때, 속상한 일이 있을 때도 많을 텐데 그럴 때마다 멀리 있는 친정어머니를 대신해서 양어머니한테 속 시원하게 하소연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여느 모녀지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뤄진 일이다.


일행은 같은 차를 타고 광덕교를 지났다. 광덕교는 옛날의 그 다리가 아니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하회마을 부용대를 갈려면 강물이 넘칠 것 같은 낮고 좁은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차로 건너서 갔는데 새롭게 건설된 광덕교는 넓고 깨끗했다. 광덕교회 앞에는 오토바이를 탄 건강하고 활달해 보이는 조나린 씨가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오토바이 뒤꽁무니를 따라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돌고 돌다가 조나린 씨 집에 드디어 도착을 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남편 정태교(농업, 41세)씨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맞이해 주었다. 특히 친정 양어머니 윤순옥 씨는 언제 마트에 들렸는지 음료수며 과자가 든 커다란 봉지를 내밀며 정겹게 안부를 주고받는 모습이 정말 모녀지간처럼 살갑게 느껴졌다. 마당 한가운데 있는 시원한 들마루에 앉아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는데, 어느새 조나린 씨가 시원한 냉커피와 수박을 내왔다. 방문객들에게 일일이 돌아가며 음식을 권하는 그 모습이 안동의 여느 집 새댁과 다를 바 없었다. 앳된 얼굴의 조나린은 한국 나이로는 1977년생인 31세이지만 필리핀 나이로는 아직 29세라며, 한국식 나이 계산법을 살짝 억울해했다.




필리핀 도시 처녀와 한국 농촌 총각의 만남
조나린 씨와 정태교 씨는 8년 전에 모 종교단체의 소개로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종교가 같은 사람끼리 결혼을 하게 되어서 그런지 특별한 반대 없이 양가의 축복을 받으면서 결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시댁은 인근마을인 신성이며 처음 결혼을 해서는 시부모님, 시할머님을 모시고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3년 전에 시댁에서 가까운 광덕으로 분가를 해서 지금은 남편 태교 씨와 두 아들 승렬(7세), 세욱(6세)이와 함께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고 있다. 분가를 했지만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시댁을 방문해서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집안일도 많이 돕는다며 남편 정태교 씨가 자랑을 늘어놓았다. 방문한 날은 두 아들이 모두 유치원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간이라 만나지 못해서 좀 아쉬웠다.


조나린 씨의 친정은 필리핀에서도 제법 큰 도시이며 현재 친정 부모님은 두 분 다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형제들은 모두 5남매이다. 집안 형편도 어렵지 않아 조나린 씨는 2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에 전공하고 싶은 분야가 따로 있어서 다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사출신 엘리트 여성이기도 하다. 전공과목은 현재 우리나라 대학으로 치면 비서학과와 비슷한 학과라며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설명을 덧붙였다. 조나린 씨는 필리핀에서 가지고 온 앨범을 꺼내 어린시절과 대학시절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시집을 온 뒤 2002년도와 2006년도에 필리핀을 다녀왔고, 작년에는 남동생 중 한 명이 조나린 씨 집에 와서 1년 정도 머무르다 가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알아야죠
국제결혼이주가정에서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가족 간의 언어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불편을 겪는 것일 것이다. 특히 자녀가 생기면 자녀들의 언어발달 문제로 고민을 하는 가정이 많다. 아기가 태어나서 옹알이를 하면서부터 엄마는 아기와 마주보며 눈을 맞추면서 같이 옹알이도 받아주어야 하고, 조금 크면 동화책도 읽어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자연적으로 자녀들의 언어발달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나린 씨는 자녀들의 언어교육을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참 현명하게 시키고 있었다. 결혼해서 한글을 열심히 배워서 그런지 우리말을 유창하게 잘 했다. 필리핀에서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영어도 물론 능숙하게 잘 했다. 그래도 우리 한글은 남편인 정태교 씨가 더 잘하기 때문에 남편이 담당해서 가르치고, 조나린 씨는 엄마의 나랏말인 영어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열심히 가르친다고 한다. 아이들이 아직 유치원에 다니고 있지만 영어를 잘하다보니 다른 친구들이 은근히 부러워한다고 했다.


조나린 씨는 어릴 때부터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현재 풍천초등학교에서 1년 계약으로 방과 후 특기적성교사로 일주일에 3일을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아직 꿈을 완전하게 이루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이란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너무 행복하다며,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정말 실력 있는 영어선생님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꿈이 하나 더 있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하회마을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싶어요.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회마을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하회마을을 찾아오는 외국관광객들에게 영어해설사로 봉사를 하고 싶어요.”
농사를 짓고 살다보니 늘 바빠서 먼 곳으로는 여행을 하지 못하는 대신에 가까운 하회마을에는 자주 들린다고 했다. 하회탈춤 공연을 보면서 함께 웃기도 하고, 탈춤도 따라 추면서 자연스럽게 안동의 문화를 배운다고 했다. 또 하회마을의 전통가옥을 세밀하게 관찰도 하고, 유교 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서 하나하나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했다.
만약에 조나린 씨가 하회마을 영어해설사로 봉사를 한다면 주변사람들이나 외국관광객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까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관광객뿐만 아니라 외국관광객들에게도 참 인기 있는 하회마을 해설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자기가 태어난 모국이 아닌 멀리 한국으로 국제결혼을 한 필리핀 새댁이 한국의 전통문화와 안동의 유교문화를 열심히 공부해서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인 하회마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영어해설사로 봉사를 한다면 모든 관광객들이 감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나린 씨의 꿈이 꼭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주여성에 대한 편견이 가시길 바랍니다.
조나린 씨는 남편과 함께 수박농사와 호박농사 등 특수작물을 중심으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다. 농사라는 것이 사람 손으로 다 하는 것이다 보니 늘 바쁘게 산다고 했다.
도시에서 살아왔던 조나린 씨가 농사를 짓고 사는 것에 대해서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았다.한국으로 시집을 와서 어렵거나 불편한 점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대답한다.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살아온 환경이 다른 사람들끼리 결혼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고 불편하지요”
너무 원론적인 대답만 하는 그녀에게 정말 어려운 점이 없냐고 짓궂게 물어보았다.
“자식이 생기고 부부가 서로 흉허물을 덮어주고 이해하며 살다보면 농사일도 그렇게 힘들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기 때문에 인내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대답도 곁들였다.


속 깊은 새댁에게 안동이 어떤 곳이냐고 물었더니 “서울, 부산, 대구처럼 큰 도시가 아니고 시골처럼 작은 도시라서 정이 더 간다.”고 웃으며 대답을 했다.
남편 정태교 씨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부인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실수를 할까봐서인지 옆에서 계속 지켜보며 상세하게 우리들에게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그가 조나린 씨와 결혼해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내부적인 문제보다 외부적인 문제였다고 한다. 그건 바로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편견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결혼해서 처음에는 부부동반으로 각종 모임에 자주 참석을 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외국여성이라는 편견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 요즘엔 아예 부부동반을 하는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임에 아예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부인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태교 씨. 오히려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친구들과 잘 어울려서 놀고 하는데, 어른들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고 한다.


태교 씨가 조나린 씨에게 늘 미안해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쉬운 말은 서로 잘 통하는데 어려운 말들은 아직 원활하게 하지 못해요” 한다. 그래도 요즘엔 ‘할매요 어디 가니껴’, ‘아지매요 장에 같이 가시더’하면서 안동사투리도 꽤 잘 한다며 은근히 자랑을 늘어놓았다. 조나린 씨는 한국으로 시집을 와서 한국말을 배우려고 무척이나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태교 씨는 영어를 배우려고 부인만큼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언어소통 문제는 자신한테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아이들과 함께 영어공부를 열심히 할 계획이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안동새댁 다 된 필리핀 새댁
‘새댁’은 새색시의 높임말이며 갓 결혼한 젊은 여자, 각시, 신부(新婦)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경북북부지역인 안동, 영주, 봉화에서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아직 올망졸망한 젊은 아줌마들을 ‘새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으로 치면 미시족쯤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가늠이 될 것 같다. ‘새댁’이라는 칭호는 결혼을 한 여인네들은 누구나 다 듣기 좋아하는 정겨운 칭호인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필리핀 새댁 조나린 씨한테 ‘새댁’이라는 호칭은 시어머니가 부르는 ‘어멈’, ‘승렬이 에미’, 남편 태교 씨가 부르는 ‘조나린’, ‘세욱이 엄마’라는 호칭처럼 이젠 가족이 된 ‘안동사람’으로 불리는 그런 정겨운 호칭인 것이다.


조나린 씨와 안동으로 시집을 온 많은 결혼이주여성들이 안동의 전통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부모님을 잘 공경하고, 남편에게는 지혜롭고 사랑받는 아내, 아이들에게는 현명하고 훌륭한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넘치지 않는 배려와 아낌없는 격려를 해줘야 할 것 같다. 그녀가 제2의 고향 이곳 풍천에서 ‘안동 여인’으로 거듭나서 그녀의 바람처럼 가족들 건강하고 아이들 잘 자라주는 그 행복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안동에서도 다변화시대에 발맞추어서 국제결혼이주여성을 위해 한글교육, 육아상담, 생활 상담과 함께 한국인 친정엄마 갖기 운동 등 다양한 계획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실제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눈높이를 잘 맞추어서 안동으로 시집을 온 결혼이주여성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행정적인 지원이 아낌없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앞으로 풍천을 한 번씩 다니러 갈 일이 있을 때면 조나린 씨와 만나 수다도 떨고 그녀가 타주는 시원한 차 한 잔도 마셔볼 참이다. <안동>

통권 111호 - 新 안동인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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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과 오빠의 부재(不在)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오빠 생각이란 이 동요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서울로 떠나는 오빠를 동구 밖에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면서 비단 구두를 꼭 사 달라며 약속을 했던 오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빠라는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날만큼 내 가슴속을 짠하게 젖게 하는 진한 감동을 주었던 멋진 친오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싸아하고 목구멍이 콱 막히면서 눈물이 난다.

 

나의 친정집은 아들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들 딸 육남매를 낳았는데 어릴 때 병마로 다 잃어버리고 겨우 딸 둘만 건져서 두 살 터울로 언니 둘이서 크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아들이 없으면 대가 끊어진다고 하여 양반집에서는 씨받이를 두기도 하고, 보통가정에서도 첩을 두면서까지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 집들이 많았다. 어머니도 아들을 못 키운 죄도 있고, 대를 이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인지 직접 여자를 물색해서 집으로 데려왔지만 아버님께서 마다하셨다는 이야기를 크면서 들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집안이었지만 동네에서는 '아들 없는 집'으로 지목이 되어 있었다. 늘 양심 바르고 인품이 좋기로 소문이 났던 우리 아버지 택호는 '두암어른'이셨다.

세월은 흘러서 아버님이 쉰이셨고 어머님이 마흔 아홉이 되던 해에 삼신할매가 두암어른한테 쉰둥이를 하나 점지해 준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은 늪실 양짓마을 집안 어른들께서 삼삼오오 모여서 '두암어른한테 느지막하게 삼신할매가  아들 하나 점지해 주나보다' 하면서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난 것이었다. 바로 위의 언니와 나이차가 열일곱 살이나 났다. 큰언니는 혼기가 차서 벌써 시집을 가고 없었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동생은 아니었지만 열일곱 살이나 적은 자식같은 어린 여동생을 애지중지하며 키워주던 작은 언니마저 내가 세살 때 시집을 간 후에는 아들못지 않게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고명딸처럼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하지만 형제가 없다보니 늘 외로웠다. 특히 국민학교를 들어가고 부터는 오빠와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왕복 십리가 되는 학교길을 오가면서 머슴애들한테 놀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 친구들은 오빠나 언니를 데리고 와서 혼을 내주기도 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곤 했지만 나는 늘 혼자서 눈물을 훔치면서 당하기만 했다. 물론 그 자리를 할머니 같은 어머니가 학교 길을 거의 동행하다시피 하면서 쉰둥이 귀여운 막내딸을 때린 머슴애들을 혼내 주면서 오빠 언니의 부재를 대신해 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난 일요일이 열일곱 살 차이가 나는 언니의 생일이었다. 큰 언니마저 세상을 뜬 지금은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친정피붙이인 셈이다. 내가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으며 컸지만 그 대신에 내 나이 스물여덟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 해에 어머님마저 돌아가셨으니 친정 부모님을 일찍 여윈 셈이다. 그래서인지 언니가 된장, 고추장은 물론이고 가을이면 김장까지 담가 주면서 친정어머니 몫을 대신 해주고 있다.

언니의 생일을 조촐하게 보낸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는 산나물김치며 깻잎김치, 매실김치 등 언니가 정성껏 싸준 밑반찬이 하나 가득 실렸다.

언니와 나는 만나서 헤어질 때마다 한마디씩을 꼭 주고받는 말이 있다. 언니는 나보고 늦게 태어나면서 하나 달고 나왔으면 친정 걱정 없이 잊어버리고 살 텐데 하고, 나는 언니가 오빠였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 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허허로운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면서 헤어진다.


지금도 나는 친정 부모님은 비록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친정오빠가 친정을 지키고 산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곤 한다. 물론 여자는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살다가 보면 시댁식구들과 부딪히는 일도 생기고 남편과 말다툼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친정에 든든한 오빠가 떡 버티고 있어준다면 내 편이 되어줄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하소연도 들어주고 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을 텐데 나는 늘 혼자서 그 외로움을 다 감당하면서 살아왔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서 철없던 쉰둥이 막내딸도 어느덧 귀밑머리가 희끗한 중년여인이 되고 말았다. 누구에게나 삶이라는 그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겠지만 친정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없는 가운데서도 인내하면서 잘 견디어 온 세월인 것 같다. 그 세월 속에서 아이들도 어느덧 다 커서 제 나름대로의 삶을 열심히 잘 살아가고 있다. 나 역시 비록 이름 없는 시인이지만 학창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시인이 되어서 시를 쓰면서 나름대로의 여유를 즐기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명절이나 친정 부모님 산소를 다녀오고 나면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서 며칠을 끙끙 앓곤 한다. 정답던 고향집은 헐리고 빈터만 남아서 집 주변에 외롭게 남아있는 감나무와 밤나무, 모과나무, 호두나무를 바라보면서 겨우 친정집 윤곽을 찾을 수가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친정이 없어진다는 것이 내 가슴에는 커다란 아픔과 한으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 이루어질 것 같지 않는 허황된 꿈을 하나 갖고 산다. 친오빠는 아니라 하더라도 ‘오빠 생각’의  노랫말처럼 나에게도 비단 구두를 사줄 수 있는 든든하고 멋진 오빠가 언젠가는 백마 타고 내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070814 / 김필녀

 

♪ ♬ 오빠 생각(하모니카) - V.A. ♪ ♬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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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생각

 

최순애 작사 / 박태준 작곡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오빠 생각>은 최순애 본인의 경험을 담은 노래로, 서울에 가는 오빠에게

비단구두를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봄이 가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와서 나뭇잎이 떨어져도 서울 간 오빠는 소식이 없어 그 안타까운 마음을 글로 썼다고 한다.

잡지에서 이 시를 본 박태준은 그 사연이 마음에 닿아 작곡을 해서 발표를 했는데,

부를만한 노래가 많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애틋한 사연과 함께 이 노래는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8분의 6박자의 노랫가락에 나타난 애상조의 멜로디 당시의 어린이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잊혀지지 않는 동요로서 오늘날에도 흘러간 노래로 애창되고 있다.


작사가 / 최순애(崔順愛, 1914~1998)
경기도 수원 출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아버지 최경우와 오빠 최영주가 소파 방정환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까닭에 자연스럽게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빠 생각>으로 문단에 나와 윤석중, 이원수, 서덕출과 함께 '기쁨'의 동인으로 활약하여

동요 <그림자>, <우산모자> 등을 발표했다. 1936년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와 결혼했다.

이후 꾸준히 동요를 발표했는데 동시집을 내려고 준비한 원고가 6·25 전쟁 중에 타버려서 남아있는

시는 몇 편 되지 않는다.


작곡가 / 박태준(朴泰俊, 1900∼1986)
아호는 금호(琴胡), 작곡가 겸 합창지휘자, 경북 대구 출생. 기독교 교단에서 운영하는 대구 계성중학,

평양 숭실전문학교(1921년)를 졸업하고, 경남 마산 창신학교, 대구 계성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동요 <오빠 생각>, <맴맴>, 가곡 <동무 생각>(일명 <사우思友>) 등을 지었고,

1929년에 동요곡집 <중중 때때중>, 1931년에 동요곡집 <양양 범벅궁>을 발간하였다.

1932년 미국에 건너가 터스칼럼대학, 웨스트민스터음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1938년까지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지냈고 1939년 가곡집 <물새 발자욱>을 발간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설하여 1973년까지 이끌었다.

1947년 <박태준 동요곡집>(음악사) 등을 발간하였고, 1946년 경성여의전 교수를 거쳐 1948년 연세대로

옮겨와 1974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있었다.

1955년에는 연세대 종교음악과를 창설하고, 1964년에는 음악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초대학장이 되었고,

1966년 정년퇴직 후 1973년까지 명예교수로 강의를 계속했다. 1952년에 미국 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부터 1968년까지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예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57년 서울시 음악문화상과 1960년 예술원 음악공로상,

1962년 문화훈장(대통령장), 1970년에 국민훈장무궁화장을 받았다.

역서로 <화성학>, <초등 화성학>이 있다.  
 

   

 ♪ ♬ 오빠 생각(하모니카) - V.A. ♪ ♬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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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개비꽃 어쩌면 너는 하늘나라 선녀였는지 몰라 지상의 아름다운 꽃들 시샘하다 장대비 쏟아지는 밤에 빗방울 타고 몰래 내려와서는 푸른 가을하늘색 닮은 작은 꽃으로 피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너는 푸른 바다 인어였는지 몰라 지상의 신비로운 모습 궁금해서 폭풍우 치던 캄캄한 밤에 하얀 파도타고 몰래 달려와서는 쪽빛 바다색 닮은 달개비꽃으로 피었는지도 몰라 070809 / 김필녀
♬ Matin Sur La Riviere(강가의 아침) / Eve Brenn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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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맞이꽃 기다렸다고 말하지 마라 그리웠다는 말은 더욱 하지 마라 밤에만 너를 찾아온다고 달 뜨는 밤에만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세상 눈빛 두려워 차가운 이슬 맞으면서도 달밤에야 살며시 꽃잎 펼치는 애틋한 내 사랑을 알아야 한다 네가 없는 깜깜한 밤에는 별만 바라보며 서럽게 젖어 너를 찾아 꿈속 헤매고 있다는 것을 너는 꼭 알아야 한다 070807 / 김필녀
♬ 달맞이꽃 / 이용복 ♬

        귀천(歸天)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시인은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가고 없는데 시인의 향기는 더 진하게 남아서 버석거리는 가슴을 적셔주고 있다 가뭄 끝에 단비 같은 마른 가슴 촉촉하게 적셔 줄 시다운 시가 그리운 날에 시인의 향기를 가슴깊이 느끼며 향기로운 차 한 잔을 마셔본다 시인은 떠나도 시는 남아 있듯이 사랑은 가도 추억은 가슴에 남아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키며 한 자락 그리움으로 되살아나 밀물처럼 가슴 가득 밀려온다 070730 / 김필녀 *귀천 : 고 천상병시인의 부인 목순옥님이 운영하는 찻집
(고 천상병시인의 부인 목순옥님이 운영하는 찻집 귀천에서) ♬ Ever Green / Suzanne Jack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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