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나무꽃* 바람의 속삭임에 얼굴 붉히며 연분홍 꿈빛으로 곱게 핀 자귀나무꽃 한 송이 가슴에 품었다 칠월 뙤약볕 아래서도 얼굴 마주하며 뜨거운 입김 뿜어내는 그 열정 담고 싶어 가슴 깊이 심었다 한낮의 뜨거운 사랑 아쉬워 어둑한 저녁 되고 별 뜨는 밤에는 살갑게 포개어 더욱 사랑한다는 자귀나무꽃 같은 사랑 하고 싶어 꿈빛 꽃 한 송이 그대 꿈길 위에 뿌려주고 싶다 070710 / 김필녀 *자귀나무꽃 : 합환목이라고도 하며 저녁 무렵이 되면 꽃잎이 서로 살갑게 포개어 잠을 잔다고 한다. 집안 마당에 심어 놓으면 부부의 사랑이 가득해지고 금술까지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나무
♬ 알고 싶어요 / 이선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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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위한 노래 당신을 두고 그리움에 젖는다는 건 참 황홀한 일이지 당신의 눈빛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 뜨겁게 전율하는 것을 당신이 있어 당신을 사랑하며 산다는 건 참 눈부신 일이지 모든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환희를 느끼는 것을 당신과 내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났다는 건 더욱 신비한 일이지 내 남은 삶에서 당신을 만난 것만으로도 다시 없을 가장 큰 축복인 것을 070705 / 김필녀 ♬ Even Now / Nana Mouskouri ♬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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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이 운다
김필녀 
절정의 짜릿한 순간이 지나고 
안타까운 여운으로 천둥이 뒤척이며 운다 
사랑의 기쁨은 번개 같이 짧고 
이별의 슬픔은 천둥의 속울음처럼 길고 아픈가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린 후에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비가 내린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별의 아픔을 알지 못하기에
빗방울처럼 아픈 사랑을 하는 걸 거다
070628 / 천둥 번개가 치던 밤에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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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논술을 하는 아이들과 함께 / 070704
      매주 수요일은 예천에 있는 까치글짓기논술학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러 갑니다. 마음이 맑은 초등학생들에게 글짓기와 논술을 가르치다보면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이번 주 수업은 1학년 아이들에게 동시를 짓는 아주 기초적인 것을 가르쳤답니다. 먼저 예쁜 색종이로 새를 접어서 새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새를 어디서 보았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새의 울음소리를 직접 내어보기도 하고, 날아가는 새의 몸짓을 흉내 내기도 하면서 그냥 쓰게 한 다음에 짧게 다듬는 것을 가르치면서 수업을 했습니다. 2, 3학년 아이들 수업은 생활문 쓰기 수업이었는데 글을 쓰기 전에 카드놀이를 직접 하고 난 다음 놀이 후의 생생한 느낌을 담아서 쓰는 수업이었습니다. 4, 5학년 아이들은 자연을 찾아서 야외수업을 하는 날이었는데 비가 내려서 이론수업은 학원에서 하고 우산을 쓰고 직접 밖으로 나가서 비 내리는 것을 보면서 한 바퀴 돈 다음에 시를 쓰도록 했습니다. 먼 훗날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어떤 글짓기교사로 기억이 될지는 모르지만 50여명의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들에게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날이 흐리고 가랑비가 내리는 날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무슨 생각이 나는지 생각나는 대로 일기나 짧은 메모라도 좋으니 글로 한 번 남겨보면 훗날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요…….'
(귀염둥이 초등 1학년 수정이, 재혁이, 형모) (카드놀이에 열중인 3한년 재민이, 기강이, 2학년인 영우, 3학년 효서) (열심히 글짓기를 하고 있는 효서와 영우) (글짓기가 쉽지만은 않지요? 글짓기상을 독차지 하고 있는 효서) (글짓기를 몹시도 싫어하던 재민이도 이젠 열심히 한답니다. 기강이도 열심이네요) (공주병에 걸린 4학년 지현이, 말썽꾸러기지만 글은 잘 쓰는 상기, 5학년 준호) (말하는 것이 조금 불편하지만 열심히 글짓기를 하고 있는 4학년 준하) ♬ 그대여 / 이정희 ♬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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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대를 바라보며 물돌이동 휘감아 흐르던 강물이 잠시 쉬어가라며 발목을 잡는다 부용대 암벽에 새겨진 사연도 들어 보고 만송정 솔밭에 흩어진 향기도 맡고 가란다 긴 세월 묵묵하게 지켜온 암벽에는 강물들의 무수한 이야기 담겨 있고 풍수해 막아 선 일만 그루 솔향기 속에는 서애선생 숨결이 바람결에 들리는 듯하다 산태극 물태극 돌아가는 물돌이동 강물 따라 줄불놀이 풍류의 멋 즐기던 선비도 되어보고 하얀 백사장에 너와 나의 발자국도 남기면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 하나 만들고 싶었다 먼 훗날 그대 기억에서 내가 잊혀진다 해도 추억 속에 이 강가를 홀로 거닐게 된다 해도 너로 인한 그리움이 강물처럼 밀려오는 날은 너를 위해 아름다운 한 줄의 시를 쓰고 싶다 070623 / 김필녀
♬ 내게 남은 사랑을 모두 드릴게요 / 장혜리 ♬


강변 풍경



 

며칠 동안 내린 장맛비로 강물이 많이 불어서 물의 흐름도 여유롭고, 강변길도 어느 때보다 깨끗해서 상쾌한 기분으로 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휴일 한낮의 강변은 참 한가롭다. 나와 마찬가지로 한 손에 우산을 든 사람들이 드문드문 산책을 하고 있고, 간간히 흩뿌리는 장맛비가 얼굴에 와 닿으니 시원해서 발걸음이 더 상쾌하다. 밤에 걷는 강변길도 좋지만 사람들이 한가하게 거닐고 있는 한낮의 강변길을 걷는 맛도 참 쏠쏠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것보다는 한적하게 거닐면서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봄 개나리가 노란 얼굴을 내밀 때 산책을 나왔으니 참 오랜만에 강변을 나왔다. 강둑에는 망초꽃, 금계국 등 이름 모를 여름 꽃이 군데군데 피어있다. 언제부터 나를 따라왔는지 참새 떼도 짹짹거리며 따라다닌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7월 녹음으로 뒤덮여 지붕 일부분만 보이는 강 건너 영호루를 쳐다보고 있는데 때마침 기차가 강물 위로 난 철길을 덜커덩 거리며 지나간다. 기차의 목적지가 부산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갑자기 기차를 타고 바닷가로 여행을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영호대교 밑을 지나는데 어르신 몇 분이서 여유롭게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다. 다가가서 구경을 하면서 나의 노년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강변 둑 여기저기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도 보였다.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가족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젊은 아버지가 낚시를 하고 그 옆에 돗자리를 깔고 가족들이 둘러앉아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구경을 하고 있는 풍경이 참 아름다워서 한참을 쳐다보기도 하며 걸었다.


나의 강변길 반환점은 임하댐이 위치한 반변 천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안동댐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만나는 곳이다. 두 물길이 만나는 곳이라 그런지 그곳에 정이 간다. 그리고 반환점을 돌면 오른쪽에 자연학습원이 있어 쉬어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학습원에는 우리나라 토종 꽃과 나무들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철마다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오늘은 주황색 꽃에 까만 점이 예쁘게 박혀 있는 참나리꽃과 길다란 꽃대끝에 핀 주황색 왕원추리꽃이 반겨주었고, 그리 예쁘지는 않지만 개쉬땅나무와 사철나무의 연노랑색 작은 꽃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나라 토종 꽃의 종류와 나무들을 한 눈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한번은 들려볼만한 곳이라고 추천을 하고 싶다.


자연학습장에서 강을 바라다볼 수 있는 의자에 물기를 닦아내고 잠시 앉아서 강물을 바라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강물이 뒤척이며 참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한다.

내가 강을 좋아하며 자주 찾게 된 것은 안동에 이사를 오고부터이니 한 20년이 된 것 같다. 타향이다 보니 단짝 친구도 없었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평화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기쁠 때보다는 슬플 때 강가를 자주 찾았었고, 좋은 일보다는 삶의 아픈 생채기로 가슴이 먹먹하고 외로울 때 강을 찾았던 기억이 더 많다. 그럴 때마다 강물은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면서 반갑게 맞아주었으며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많은 위안을 받으며 돌아오곤 했다.

20여년 강가를 거닐면서 터득한 것도 참 많다.

강물도 흐르다가 보면 돌 뿌리에 채여서 생채기가 날 때도 있다고도 했다. 그 아픈 생채기는 저절로 아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생채기가 채 아물기도 전에 더 아픈 생채기가 생겨서 잊고 살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람도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에 그냥 출렁이며 살아가는 수밖에 다른 뾰죽한 방법이 없다고도 했다.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너도 나도 넓은 바닷가에서 함께 만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일이 외롭고 고달프기도 하지만 살다가 보면 좋은 날도 더러는 있다고도 했다. 강물도 흘러가다 보면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을 안고 행복에 겨워 은빛으로 자지러질 때도 있고, 강변에 핀 이름 모를 들꽃과 눈이 맞아서 아름다운 사랑의 밀어를 나누며 행복에 겨워 밤을 새는 날도 있다며 위로를 해 주기도 했다.


젊은 날의 혈기로 나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인내심이 부족하여 받은 삶의 생채기 때문에 괴로웠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잘 견디며 버티어왔다. 이제 내 남은 삶을 더욱더 아름답게 꽃피우며 펼쳐나가고 싶다. 이제는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너무 조급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최선을 다하면서 흐르는 세월 속에 강물처럼 출렁이면서 그냥 살고 싶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는 말도 있듯이, 강물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다짐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발걸음은 늘 바쁘다. 강물처럼 여유롭게 살겠다고 다짐한 것을 벌써 잊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오늘이 7월 1일이다. 한 해의 반년이 지나가고 어느덧 7월을 맞이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아직 반년이나 남았으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차근차근하게 정리하고 처리해 나가자고......,'


070701 / 김필녀








 

작곡재(외삼재)의 악동들



작곡재는 우리 마을에서 봉성장이나 학교에 갈려면 꼭 넘어야 하는 재의 이름이다. 봉성장터까지의 거리가 한 오리쯤 된다고 하는데 작곡재는 그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작곡재를 어릴 때 엄마 등에 업혀서 넘기도 했겠지만 그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여덟 살이 되면서 엄마 손을 잡고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서 봉성국민학교에 입학을 하면서부터는 공일이나 방학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이 재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학교를 갈 때는 양지마을 샘가에 모여서 언니들이나 오빠들과 함께 모여서 갔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마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사는 또레들끼리 모여서 오곤 했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겠지만 가방도 없이 책을 싸맨 보자기를  여학생들은 허리에 차고 다녔고, 남학생들은 한쪽 어깨와 겨드랑이 밑으로 엇비슷하게 메고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봉성지서를 지나면 쭉쭉 뻗은 미루나무가 양쪽으로 서 있는 신작로를 한참 가다가 왼쪽으로 난 산길로 해서 작곡재를 넘어 집으로 향하곤 했다.


학교를 오가는 길은 우리들에게 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맞이해 주었기 때문에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다녀서 개근상을 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봄이면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 옆의 산길은 진달래와 오디, 산딸기 등 우리들에게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여름이면 신작로 미루나무 그늘에 앉아서 한낮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도 했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작곡재 고갯마루에 올라와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책보자기를 풀어 놓고 작은 돌멩이들을 주워 모아서는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서 공기놀이를 하면서 쉬어 갈 때도 많았다.

들판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에는 논둑에서 메뚜기를 잡으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고, 남의 무우밭에 몰래 들어가서 굵고 잘생긴 무우를 쑥 뽑아서는 손으로 껍질을 깎아 먹으면서 깔깔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추운 겨울이 제일 괴로운 학교 길이었다. 학교 갈 때는 작곡재를 넘어가면서 봉성에서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에 몹시 추웠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아침과는 반대방향으로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에 작곡재를 넘어 집으로 오는 길은 더욱더 옷깃을 꼭꼭 여미게 되었다. 옷을 몇겹이나 껴 입었지만 그 당시의 포플린과 얇은 무명옷으로는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기란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겨울이면 누가 먼저 만들었는지 양지바른 산 밑으로 토끼 길처럼 작은 길이 새로 나 있기도 했다. 바람을 등으로 막기 위해서 뒤로 걷기도 하고, 눈이 얼어붙은 응달진 곳에서는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면서 다녔던 학교 길이었다.


이렇게 계절마다 추억거리를 만들면서 다니던 학교 길이었지만 작곡재를 넘어가는 길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올라가곤 했다. 왜냐하면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동 머스마들이 작곡재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언제 먼저 와서 기다렸는지 악동들은 작곡재 이쪽과 저쪽 끝까지 어느새 금을 그어 놓고서는 나무 뒤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넘어가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곤 했다.

그 금은 악동들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면서 큰 막대기를 들고 엄포를 놓고서는 저희들끼리 산에 올라가서 실컷 놀다 오기도 했다. 순진한 여자아이들은 악동들이 금을 넘어가도 좋다는 허락이 있을 때까지 누구도  감히 그 금을 넘어가지 못하고 마냥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마음이 내키면 누구누구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누구하면서 애를 참 많이 먹이곤 했다. 그 악동들은 학교에서도 노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여자아이들끼리 모여서 하는 고무줄을 끊어가며 애를 참 많이 먹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작곡재도 많이 낮아지고 넓어졌으며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서 고향 가는 길이 한결 쉬워졌다. 그리고 그 못된 짓을 즐기던 악동들도 모두 멋있는 중년의 신사가 되어 다들 잘 살고 있다. 동창회 때 가끔씩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도 하지만, 때 묻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들의 우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운 친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다시 불러본다.

악당 우두머리 성대야, 그리고 우철아, 정흠아!

지금은 우리 여자아이들한테 꼼짝도 못하지 그치!

어느덧 우리도 희끗한 머리가 더 어울리는 지천명을 넘기고 말았구나.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멋있고 행복하게 잘 살자꾸나…….

 

070629 / 김필녀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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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메산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아



늪실 양지마을에서 우리 집은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네 살 때 태극기를 들고 새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하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거린다. 집이 제일 높았기 때문에 마을에 낯선 손님이 오면 누구네 집 손님인지 마당에서 훤하게 다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우리 동네 앞에는 이름도 정다운 동메산이 있었다.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올라간 친구가 ‘미자야, 정숙아 노올자’하고 부르면 친구들이 부리나케 동메산으로 올라와 같이 놀곤 했다.

산이 나지막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동네친구들과 함께 자주 올라가서 소꿉놀이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며 놀았던 산이다.

봄이면 혓바닥이 새파래지도록 참꽃을 따서 먹었고, 집집마다 누에를 쳤기 때문에 뽕나무에 오디가 열리면 입언저리가 까맣도록 오디를 따 먹으며 해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여름이면 매미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공기놀이도 하고,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엄지와 검지를 튕겨서 아카시아 잎을 누가 더 빨리 따서 없애는 내기도 했다. 가을이면 아직 익지 않은 떫은 땡감과 사과를 몰래 따와서 먹기도 하고, 겨울이면 언덕배기에서 비료포대를 깔고 썰매를 타며 해 지는 줄 모르고 놀았던 동메산이었다.

해가 뉘엇뉘엇 해질 무렵이면 초가지붕 뒤에 솟은 굴뚝에서는 뽀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하나 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특히 우리 집은  동메산과 높이가 거의 비슷한 제일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더 잘 들렸다. '필녀야, 이제 그만 놀고 집에 들어와서 밥먹고 공부해야지'하는 세상에가 가장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친구들과 손을 잡고 집으로 내려가곤 하던 행복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언제쯤인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친정 부모님 산소를 찾아갔는데, 그 동메산이 헐어져서 밭이 되어 있었다. 옛날 추억을 되새겨 보면서 흔적 없이 사라진 동메산이 몹시 그리웠다. 동메산에 올라가서 그 때 그 친구들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보고도 싶었다.

언제 어떻게 해서 없어졌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친정동네에 가면 그 동메산이 있던 자리를 쳐다본다. 그리고 내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산이 없어진 게 몹시 아쉽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은 동메산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몹시 그리운 날이다.


070626 / 김필녀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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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아버지와 천수답(天水畓)


요즘이 농촌에서 제일 바쁜 모내기철이다. 겨울이 지나 해동이 되면서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던 논둑은 모심기를 대비해서 깨끗하게 미리 손질이 된다. 부지런한 농부의 손은 논물을 가두고 어느새 써레질까지 해 놓았다. 써레질을 해 놓은 논물이 바람에 찰랑대면서 오월의 맑은 햇살이 반사되어 눈이 부신다.

휴일이면 남편과 함께 간단한 먹거리를 넣은 배낭을 하나씩 둘러메고 천년 고찰 봉정사가 자리한 천등산으로 산행을 자주 간다. 여름을 알리는 정겨운 뻐꾸기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하얀 아카시아 꽃과 찔레꽃 향기를 맡으면서 땀을 흘리며 한 시간 여 올라가면 천등산 정상이 나온다. 정상에 잠시 앉아 땀을 닦으며 따끈한 커피 한잔을 나누어 마시는 그 기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산행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곤 한다. 내려오는 길은 정상에서 개목사 쪽으로 돌아서 봉정사 영산암을 지나 일주문을 나서면 오른쪽으로 작은 샛길이 나온다. 주차장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지만 구불구불한 논둑길을 걸으면서 어릴 적 고향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늘 논둑길을 걸어서 주차장으로 향한다.


내 고향은 큰 강이나 냇가가 없는 경북 봉화 산촌마을이며, 마을이름도 정겨운 늪실 양지마을이다. 조상대대로 터를 잡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씨족마을이기에 대부분이 일가친척이다.

옛날이나 지금도 논농사 중에 모심기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그 옛날 농사는 삶 그 자체였다. 사람손이 안 가면 되는 게 없던 시절이었기에 농사철만 되면 집안엔 사람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었고, 어린이의 손까지 필요했던 농사철에는 초등학교에서도 가정 실습이라는 제목 하에 짧은 방학을 했다.

고향마을의 대부분의 논은 천수답(天水畓)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모내기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논물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 집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천수답 논배미 중 제일 위쪽에 있는 논의 한 귀퉁이에서 웬만한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내기철이나 가뭄이 심할 때는 물이 나는 우리 논의 물꼬를 조금이라도 터놓아야 아래쪽에 있는 다른 집 논에서도 제 때에 모내기를 할 수가 있었다.


가뭄이 심할 때는 이 물꼬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주 말다툼을 하시곤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물꼬를 조금이라도 터줘야 아래쪽에 있는 다른 집 논에서도 모내기를 제 때에 할 수 있다”는 주장이셨고, 어머님은 “우리 논에 물도 모자라는데 남의 논물 걱정까지 할 일이 무어 있느냐”는 주장이셨다.

작은 물꼬 하나로 제 때에 모내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아버님의 깊은 뜻으로 우리 논두렁의 물꼬는 늘 조금씩 터져 있었다. 하지만 보릿고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겨야 하고, 자식들의 배를 곯지 않게 하기 위해서 빈곤한 곳간을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께서는 모내기철이나 가뭄이 심할 때는 아버지 몰래 물꼬를 막아 놓았다가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을 때도 있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자주 지내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농사에는 물이 중요하였으며 큰 강이나 냇가가 없었던 산촌마을에서 물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논농사에서 물꼬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비가 오거나 가물면 더 바쁘게 돌아다보아야 한다. 적당량의 물이 논에 차도록 하는 것은 논농사에서 기본이 되는 일이었으며 농부가 물꼬를 조절하는 것이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벼농사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친정아버님께서도 물꼬를 돌보기 위해 날이 새기도 전에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셨고, 해가 지고 어둑해질 때까지 논두렁에서 물꼬를 돌보곤 하셨다.

물꼬 때문에 이웃끼리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지만, 모내기가 시작되면 서로 품앗이를 해서 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마을에는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다. 깨끗하게 써레질 한 논에서 못줄에 맞추어 모를 내면서 어른들이 다함께 부르는 구성진 노랫가락에는 정겨움이 넘쳐나고 흥이 배어있었다. 그리고 논둑에서 먹던 새참과 들밥은 아마 그 시절에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농부의 딸이어서 그런지 농사를 짓고 살지는 않지만, 모내기철이나 들판을 지나다보면 나도 모르게 차를 세우고 바쁘게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손놀림과 들판을 한참 쳐다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작은 물꼬 하나로 이웃을 배려하시던 친정아버님의 깊은 마음을 늘 되새겨 보게 된다.


친정 부모님 돌아 가신지도 2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세상도 참 많이 변했다. 모내기철이면 많은 사람들로 떠들썩해야 할 들판이 기계소리로 요란하다. 써레질을 하는 트랙터 소리, 모판을 나르는 경운기 소리, 그리고 이앙기로 모를 내는 소리까지 들판에 기계음이 가득하다. 요즘엔 모내기철이나 가뭄이 들어도 들판 곳곳에 관정이나 지하수를 파서 옛날처럼 물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곳곳에 댐이 많이 건설되어 가뭄이나 장마에도 큰 걱정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물 걱정을 하지 않고 살다보니 너도나도 물을 너무 낭비하는 것 같다. 내가 사는 안동은 안동댐과 임하댐이 있어 항상 물이 넘쳐흐르고 있으니 더더욱 물이 귀한 줄 모르고 살고 있다.

환경오염이 점점 심해져서 지구온난화가 계속되어 지구 곳곳에서 많은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평균기온이 상승하고 집중호우와 태풍과 가뭄 등의 많은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공장에서 몰래 버리는 폐수와 가정에서 무분별하게 남용하는 세제 때문에 수질오염이 심각해져서 머지않아 가정에서 먹는 물까지도 오염되어 물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수질오염에 대한 보도를 자주 접하다보니 물을 많이 쓰는 주부로써 걱정이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을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 화장실이라고 한다. 손잡이를 누를 때마다 변기에는 약 20-25리터의 물이 사용되는데 변기 통 속에 물이나 돌을 채운 플라스틱 병을 넣어두면 손잡이를 누를 때마다 4-8리터의 물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세수할 때 필요한 물의 양은 3리터 정도인데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세수를 하면 10리터의 물이 버려진다고 한다. 또 그릇을 닦으면서 물을 틀어 놓으면 113리터의 물이 낭비되는데 그 물로는 자동차 한 대를 닦을 수 있다고 하고, 라면국물 한 그릇을 깨끗한 물로 만들려면 욕조 물 5통이 필요하다고 한다.

위의 예를 보더라도 우리 주부들이 먼저 물을 절약하고 수질오염을 방지 하는 일에 솔선수범해야 할 것 같다. 세탁기를 사용할 때나 설거지를 할 때 적당량의 세제를 쓰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일을 철저히 해야 할 것 같다.

내 아들딸들에게 깨끗한 물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물을 아껴 쓰고, 수질오염을 줄일 수 있는 ‘물사랑’을 몸소 실천해야겠다.

 

070520 / 김필녀


* 천수답(天水畓) : 물의 근원이나 물줄기가 없어서 비가 와야만 모를 내고, 기를 수 있는 논.

* 논물 : 논에 괴어 있는 물. 또는, 논에 대는 물.

* 논배미 :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하나하나의 구획.

* 물꼬 : 논배미에 물이 흐르게 만들어 놓은 어귀.


출처 : 독서논술지도사 김필녀서재
글쓴이 : 김필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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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이 운다
김필녀 
절정의 짜릿한 순간이 지나고 
안타까운 여운으로 천둥이 뒤척이며 운다 
사랑의 기쁨은 번개 같이 짧고 
이별의 슬픔은 천둥의 속울음처럼 길고 아픈가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린 후에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비가 내린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별의 아픔을 알지 못하기에
빗방울처럼 아픈 사랑을 하는 걸 거다
070628 / 천둥 번개가 치던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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